지난 2010년 1월 27일 수요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의회국정연설(the State of the Union)이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은 신년이 되면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입법부의 초청 형식으로 의사당에 출석해 국민들에게 국정현황을 보고하고 새해의 국정계획을 설명하는 전통이 있다. 이러한 전통은 미국의 연방헌법 제2장 3조에서 규정하는 대통령의 헌법상의 의무에서 비롯되었는데, 사실 미국 연방헌법에는 그 전달방식이 연례적인 의회연설이라는 지금의 모습으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죠지 워싱톤이 1790년 1월 당시 수도였던 뉴욕에서 첫 의회국정연설을 시작했지만, 평등사상과 공화정을 강조한 기념비적인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이러한 형식이 영국 국왕의 연례적인 의회연설 예식을 모방한 귀족적인 예식이라고 생각해 실제 연설은 하지 않고 대신 문서로 의회에 연례보고를 제출하여 의회 서기가 대독하게 했다. 이후 이러한 문서보고 형식이 유지되어 오다가 1913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다시 연례의회연설이라는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오늘날의 전통에 이르게 된다.
대통령의 의회국정연설은 형식상 입법부의 양원 대표, 즉 상원을 대표하는 부통령과 하원을 대표하는 하원의장(Speaker of the House)이 양원 의원들을 모아놓고 행정부 대표인 대통령을 초청해 연설을 듣는 형식으로,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사법부를 대표하는 연방대법원의 대법관들도 초청을 받는다. 그 외에도, 행정부의 각 부처를 대표하는 장관들, 군을 대표하는 합동참모본부 소속 군 수뇌부 등 미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층들이 자리를 함께 하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대통령권한승계 서열에 있는 일부 주요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회연설시간 동안 모처에 대피해 있도록 규정되어 있기도 하다. 지난 2001년 9.11 테러공격 이후에는, 의회의원들 중에서도 여야를 대표하는 일부 핵심 인사들을 대피시키도록 하고 있다.
올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후 첫 연례국정연설은 대체적으로 무난하고 성공적이었다는 평이었지만, 공중파 4사의 채널을 통해 전국적으로 생중계된 연설의 화제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 말미에 며칠 전 연방대법원에서 내려진 특정 판결(Citizens United v. Federal Election Commission)을 언급하면서 그 판결이 가져올 혼란과 우려스런 상황을 대비해 의회에서 관련 입법을 서둘러 줄것을 요청하는 장면이었는데, 관례 대로 대통령이 연설하는 단상 바로 앞에 마주보고 착석해있던 대법관들 중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이 얼굴에 불쾌한 기색과 함께 고개를 흔들며 사실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우연히 방송 카메라에 잡힌것이다. 전통에 따라 사법부를 대표해 대통령의 연례국정연설에 참석하는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은 정치적인 중립을 표방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대통령의 연설에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 오랜 관례다. 국가수반이기도한 대통령의 입장과 퇴장 때 환영과 환송을 표현하는 의례적인 기립박수 외에 실제 본연설 시간 동안에는 출석한 대법관들 모두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찬성이나 반대를 유추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알리토 대법관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매우 보수적인 입장으로 유명한 알리토 대법관의 평소 성향을 감안하면 더욱 특별한 일일것이다. 물론 미 법조계 보수층에선 오바마 대통령의 특정 판결에 대한 언급 자체가 먼저 사법부 대표들에 대한 결례이며 삼권분립을 망각한 월권적인 행동라는 비난을 하고 있기는 하다. 상원 법사위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공화당의 오린 햇치 상원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이 대법관들의 면전에서 그들이 내린 특정 판결을 비난하는 것은 무례한(Rude) 행동이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한 것은, 2002년 공화-민주 양당이 여야합의로 입안해 통과시킨 선거개혁법안(세칭 맥케인-파인골드 법안)의 일부 조항을 연방대법원이 위헌으로 판단한 판결로, 기업들이 정당 후보자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비난하는 방송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부분을 무력화 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외국회사를 비롯, 특별 계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일부 이익단체들, 특권층이 미국의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된 문제를 수정할 수 있도록 민주, 공화 양당이 관련 입법을 서둘러 통과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연방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자신들이 내린 이전 판례들(Austin v. Michigan Chamber of Commerce (1990), McConnell v. Federal Election Commission (2003))을 뒤집은 것으로, 보수파로부터는 필요이상의 정부규제를 무력화 시킴으로 제1수정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판결이라는 후한 평가를, 진보파로부터는 특권층에게 합법적인 금권선거를 보장하는 어리석은 판결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법원의 사법적 판단이야 많은 경우 양날의 칼과 같기에, 이러한 상반된 평가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다만, 이번 헤프닝으로 세인들에게 화제가 된것은 오바마 대통령과 알리토 대법관의 악연이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 자신의 전임자 죠지 부시 전 대통령이 새뮤얼 알리토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 후보에 지명했을 당시, 상원의 알리토 대법관 인준 반대를 앞장섰던 전력이 있다. 당시 오바마 상원의원은 알리토 지명자가 하급법원 법관 시절 헌법의 해석과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보다는 힘있는 사람, 개인의 인권보다는 강력한 정부 혹은 기업 편에 유리한 판결을 해왔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반대표를 이끌었으나, 알리토 지명자는 당시 상원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의 도움으로 58 대 42라는 비교적 근소한 표차로 겨우 인준을 받는데 성공을 한다. 이후 오바마 의원은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며 대통령에까지 당선되지만, 오바마의 당선자 시절 연방대법원의 축하 리셉션에 알리토 대법관은 유일하게 불참하는 것으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 자신 같은 법조인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번 국정연설에서의 오바마 대통령의 언급을 삼권분립을 파괴하는 월권이며 사법부를 무시하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법조인들의 억지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사법부의 사법적 판단을 존중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법집행의 혼란과 부작용이 예상되기에 법을 만드는 또 다른 권력의 한 축인 입법부에 대책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헌법적 권한이다. 실제로 연설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존중한다는 언급과 함께 해당 판결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인 생각을 표현하였고, 사법부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판결의 결과로 파생될 문제에 대한 입법부의 조속한 대처를 촉구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번 헤프닝이 당분간 와싱톤의 여러 호사가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 하겠지만, ‘정부의 최고위층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견해차이를 때론 공개적으로, 또 때론 비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한 부분’이라는 백악관의 부대변인의 말이 왠지 대단한 자부심처럼 들리는 것은 단지 나 한 사람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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